▲ 이양수 SK이노베이션 SHE본부 본부장

2003년에 개봉되어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 황산벌의 포스터에는 ‘아쌀하게 거시기 해 불 것입니다!’는 표어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백제군은 비장의 각오로 서로 “거시기할 때까지 거시기 해 불자!” 라고 하지만 신라군의 스파이들은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자”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였으니 거시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게 당연한 일입니다. 거시기는 문맥에 따라 수많은 뜻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사투리로 치부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동안 같은 생활 방식을 유지했던 사람들끼리는 이렇게 이야기해도 서로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짚어보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시건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리처드 니스벳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편찬한 <생각의 지도>를 보면, 동양인과 서양인이 세상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동서양의 여러 가지 인식 차이를 설명한 이 책의 한 부분 중에는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양과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서양’이란 부분이 있습니다. 서양은 사물에 보다 관심에 있는 반면, 동양은 관계에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양(연구에서는 주로 한국과 중국, 일본이 중심임)의 언어는 주로 맥락에 의존하며, 단어는 대개 다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영어는 단어가 매우 제한적이고, 일반적으로 영어 사용자들은 단어를 사용할 때 맥락의 도움 없이 이해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많은 언어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양의 언어는 맥락보다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동양의 언어는 주제 중심적이라고 합니다. 서양인들은 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지만 동양인에게 행위란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발생하거나 주어진 상황에 자신이 적응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런 차이가 동서양인들 간의 communication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문화의 차이가 생기는 원인중의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문화에 따라 소통 방식을 고맥락 문화와 저맥락 문화로 구분하였습니다.
고맥락 문화는 기존 문맥이나 맥락을 알지 못하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권을 칭합니다. 이런 문화는 주로 농경사회로부터 출발한 문화권(동양권)이나 상하가 명확한 조직에서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군대생활을 되돌아보면 이런 일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로서 군대 고참들은 졸병들에게 흔히 “꼭 말로 해야 알아듣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런 고맥락 문화에서는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의사소통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중심이 됩니다.
한편, 저맥락 문화는 제품설명서처럼 듣는 사람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하여 말의 뜻이 분명하게 이해되는 문화권입니다. 리처드 니스벳 교수의 연구 결과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고맥락 문화권인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점점 저맥락 문화가 요구됩니다. 이 과정에서 두 문화권이 혼재되어 소통에 문제가 생깁니다. 상대적으로 기성세대는 고맥락 문화의 영향이 남아 있는 반면 젊은 세대는 점점 저맥락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기성세대는 젊은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불평하게 되고,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기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7월 초에 발생한 아시아나 항공기의 샌프란시스코 공항 착륙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 원인에 대해 미국 언론들이 조종실에서의 소통 문제를 원인의 한 부분인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미국의 경제전문방송 CNBC 인터넷판은 9일 ‘한국 항공사가 이미 여러 차례 안전문제를 겪었음에도 다시 큰 사고를 낸 이유는 한국문화의 권위주의와 위계질서 때문’이라고 보도했고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토머스 코챈 교수는 “한국 문화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위계질서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며 “이 두 가지가 결합할 경우 의사소통은 일방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조종사 사이에서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도 위계질서 때문에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CNBC는 또한 존댓말을 사용하는 한국의 언어구조도 항공 사고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기장에게 더 많은 단어와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다 보니 분초를 다투는 조종사 간 대화가 비효율적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CNBC는 지난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의 원인이 조종사간 소통 문제였음을 들며, 이 사고 이후로 대한항공은 조종사가 기내에서는 모두 영어를 쓰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전했습니다.

사실 우리에겐 뼈아픈 이야기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도 상사에게 직접적으로 즉각 말하기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문화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자도 실제 이런 사례를 생산 현장에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비 작업 후 다시 재가동 하는 과정에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순간 판단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상 운전시보다 인력도 많이 투입하지만 가끔 후배 사원들이 선배들이 무엇인가 잘못하더라도 바로 지적하지 못하고 말을 빙빙 둘러 이야기 하여, 선배들이 자신의 잘못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해 결국 공장을 다시 정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무엇 보다 중요한 요소임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체면 문화는 이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체면 문화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안전문화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